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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내수공업/커미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by 따이얏 2024. 11. 14.

사탄님 글커미션 백업본
-빛전에메 (이딘멧)
 
 
에메트셀크는 술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입에 댄 적도 없는 건 아니다. 종말 이후, 갖은 가면을 얼굴 위에 올리며, 불완전한 생명체들과 섞여 사는 동안 그깟 술은 얼마든 마실 기회가 있었다. 그보다 더 이전, 완벽했던 세계에서도 이따금 입에 대본 적은 있었고.
 
다만 그는 그때부터 술이라는 음료를 그리 내키지 않아 했다. 음주란 이지를 뒤흔들고 정신을 무너뜨리는 행위다. 게다가 세계가 분단된 이후에는 동포를 되살리고 완벽했던 시대를 다시 불러오기 위해 책무를 진 자로서, 그는 늘 올곧은 정신을 유지해야만 했다. 무대 위에 선 배우가 대본을 잊을 수는 없듯이, 그는 제 할 일을 똑바로 해내야 하는 처지였으므로. 따라서 진정으로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신다는 건 긍지 높은 에메트셀크로서는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솔직히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역시 오래 살아있고 볼 일인가? 에메트셀크는 무겁게만 느껴지는 눈꺼풀을 치뜨고, 몸을 좀 더 웅크린 채 소파에 제 육신을 파묻었다. 루가딘의 몸집에 맞춘 탓인지, 이 집의 가구들은 갈레안 중에서도 썩 크지 않은 솔의 신체에 비해 유독 거대하게 느껴졌다.
 
아무렴, 작은 것보다는 낫겠다만. 별 쓸데없는 생각을 이어가던 에메트셀크는 다시금 술병을 기울였다. 라노시아에서 난 무슨 포도주랬나, 라벨을 들여다봐도 눈에 익지 않은 걸 보아 그다지 유명한 양조장은 아닌 모양이다. 싸구려겠지. 그런 것치곤 제법 맛은 좋았다만. 아마 몇 해 전에 그 동네 포도 농사가 풍작을 기록한 듯했다. 좋은 포도에서는 좋은 포도주가 나오는 법이니까.
 
언젠가 아젬이 가져와 먹여준 화산 분화구 근처에서 나는 포도처럼 말이다. 에메트셀크는 병 채로 술을 꿀꺽 삼켜대다가 오만상을 썼다.
 
아젬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싶어서 술을 마시기 시작한 건데, 어째 마실수록 그놈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다 잊은 줄 알았던 추억이라거나, 분명히 갈라내었을 감정의 편린들마저 뒤따라 피어났다. 그것들은 삐죽하고 날카롭게 서서 에메트셀크의 속을 죄 긁어놓고 있었다.
 
‘…젠장.’
 
더 이상 볼 수도 없는 녀석이라는 건 이미 지겹도록 체감했다. 쪼개져 버린 혼을 보았을 때, 어쩌면 그 이전부터 더 이상 살아있는 아젬은 볼 수 없으리라는 생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반복해서 해왔으니까. 그러니 마음에서도 떠나보내는 것이 맞다. …분명 그게 맞는데. 에메트셀크는 제 머리를 엉망으로 헤집었다. 바닥을 구르는 술병을 치우던 이딘이 접시를 들고 돌아온 건 그즈음이었다.
 
“이번엔 또 뭐가 불만이길래 술을 그렇게 마셔대는 거지?”
 
불퉁한 목소리가 알코올로 인해 어질거리는 귓가를 때렸다. 그러나 말씨와는 달리, 접시에는 손으로 집어 먹기에 편할 만한 음식이 놓여 있었다. 식사라기보단 안주에 가까운 것들이기는 했으나, 혼자 먹기에는 꽤 많은 양이다. 그걸로 보아 둘이 같이 먹으려고 가져왔다는 사실만큼은 자명했다. 그러한 사소한 행위조차 누구를 떠올리게끔 만드는 바람에, 에메트셀크로서는 썩 유쾌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는 입술을 불만스레 일자로 꾹 다물고는, 고개를 미세하게 세워 이딘을 흘겨보았다. 이딘은 제가 들고 있던 술병을 빼앗아, 남은 액체를 나무로 만든 잔 안에 들이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에메트셀크는 부러 연극 톤의 어조로 늦은 답을 입 밖에 내뱉었다.
 
“뭐가 어때서? 저장고를 보니 도저히 혼자 마실 양이 아니던데. 내가 친히, 식초가 되어버리기 전에 처리하는 걸 도와주고 있는 거잖아? 영웅 나리.”
“하, 이 주정뱅이가 못 하는 말이 없네. 아까는 시종 노릇이나 시키더니만.”
“덩치에 비해 속이 좁은걸. 그런 것에 아직도 꽁해 있다니. 흥, 그 녀석이라면….”
 
술을 양껏 들이켠 것 치고는 부드럽게 돌아가던 혓바닥은 곧 실언을 내뱉고 만다. 에메트셀크는 입 안의 말랑한 살을 깨물고는 바짝 굳어버렸다. 그 녀석이라면… 뭐?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거지? 저 녀석은 아젬이 아닌데.
 
…페르세우스가, 아니라고.
 
에메트셀크는 입꼬리를 일그러뜨렸다. 이래서야 이딘이 제게 화를 내도 뭐라 할 말이 없다. 자신은 그 남자를 아직도 잊지 못한 모양이니, 우스운 일이지. 어쩌면 이딘이 다른 사람 이야기를 했을 때, 유독 거슬렸던 이유는 저 자신에게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직 아젬을 못 잊은 것처럼 구는 건 나였으니까. 그러니, 그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는 확연히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됐다, 방금 말은… 그냥 잊어버려.”
 
문장의 끝을 장식하는 건 적막이다. 그는 방금 발언에 대해, 이딘이 뭐라고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외로 이딘은 별다른 말 없이 포도주를 한 모금 홀짝일 뿐이었다.
 
미묘한 변화다. 언제부터였지? 에메트셀크는 알딸딸한 머리로 천천히 그에 대해 되짚었다. 떠오르는 건 하나뿐이었다. 이딘이 저를 아모로트까지 찾으러 왔을 때 이후로, 그는 확연히 좀 더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고는 했다.
 
배려일까.
 
서로 그런 걸 해줄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미 그에게 패했음을 인정하고, 물러날 것을 받아들인 지금 와서 다시금 서로의 미래를 걸고 싸우자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한들 배려라니. 그런 간질거리는 마음을 인지할 때마다 에메트셀크는 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배려받는 게 불편해서는 아니다. 오히려 그가 슬쩍 제 눈치를 살펴오는 건 조금은 즐겁기까지 했다.
 
다만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이딘의 문제는 아니겠지. 에메트셀크는 그게 전적으로 제게 속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주변을 메우던 모든 것들이 이미 다 사라졌음에도, 오롯이 그만이 상실을 고스란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리움이 너무나도 거대하고, 오래 묵어서 소화시켜 흘려보내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 탓일까. 에메트셀크는 한숨을 푹 내뱉고는 몸을 일으켰다. 발걸음이 비틀거린다. 간신히 넘어지지는 않은 채, 그는 그대로 제 맞은편에 놓인 좀 더 널찍한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이딘의 옆이었다. 고작 열 걸음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으므로, 그는 금방 목적으로 하던 자리에 주저앉았다.
 
“술 냄새….”
“좀 참아봐, 영웅님.”
 
에메트셀크는 짤막한 웃음을 내뱉고는 몸을 기울였다. 뒤로 기댔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옆으로 기울어진 모양인지 뺨과 어깨에 낯설면서도 낯익은 온기가 와 닿았다. 지금까지 여러 모험을, 사선을 넘나드는 전투를 해왔음을 증명하듯 단단한 근육으로 짜인 신체는 결코 무너질 일이 없을 것 같았으므로, 에메트셀크는 제 몸에서 힘을 쭉 풀고 그에게 무게를 더했다.
 
그럼에도 그는 에메트셀크를 밀치거나 몸을 피하는 일 없이, 그저 묵묵히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그게 참 편했다. 에메트셀크는 눈을 감고, 느릿하게 숨을 내뱉었다. 캄캄한 암흑 속에서, 곁을 지키는 온기는 생각을 부드럽게 이끌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이 녀석에게 무얼 바라는 걸까.’
 
이딘만큼은 고대의 풍경을 기억한다. 허나 그는 어디까지나 현시대의 영웅이다. 고작 짧은 기간 동안, 그마저도 엘피스와 재현된 아모로트에서 지냈다는 것만으로는 그 시대를 진정으로 살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에게 남은 기억 역시 단편적인 것이겠지. 그건 즉, 이 세계에는 진정으로 고대인과 동등한 시선을 지닌 존재는 남아있지 않다는 의미였다. 원형들을 포함하여 조디아크에 바쳐진 혼도, 하이델린도 전부 별바다로 향하거나 아예 흩어지고 말았으므로. 이제 와서 돌아온 에메트셀크는 그야말로 이 세계에 남은 유일한 이방인이었다.
 
그래서 외로워지기라도 했나? 그러니 그 아름다운 과거를 조금이나마 엿본 그에게 불완전한 이해를 요구하는가? 그게 불가능하여 이렇게 망가지고 있는가? 아니, 그랬더라면 진작 망가졌어야지. 함께 분단을 피해 살아남았다곤 하나, 라하브레아도, 핵에서 떨어져 나온 엘리디부스도 이미 오랜 시간을 지나며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는데, 아무렴. 에메트셀크는 잘못된 추측을 하나씩 지워갔다.
 
그렇다면 그가 아젬의 조각이라서? 에메트셀크는 눈을 뜨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제는 눈에 익은 낯 아래로 그리운 빛깔의 에테르가 일렁거린다. 불완전하고 모자란 영혼…. 에메트셀크는 최근에 떠올렸던 가정과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다. 그 영혼을 이어받은 자라면, 어쩌면….
 
‘…하.’
 
어쩌면? 그는 스스로의 한심한 생각에 조소를 보냈다. 이딘에 대한 판정은 이미 예전에 끝냈다. 이전부터 이딘이 못내 신경 쓰이던 건 사실이며, 기어코 그를 보고자 이 세계에서 퇴장하기를 멈추고 머물기를 결정하기까지 한 건 맞다. 이딘 역시 저를 잡고자 했었고.
 
하지만 그건 이딘에게서 아젬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은 아니다.
 
‘그래, 알 것 같군.’
 
거듭 생각해도 이건 오로지 에메트셀크, 그 자신의 문제였다. 다방면으로 고민해봐도 그의 마음만이 원인이었다. 진작 정리했어야 할 마음을 건드리지 못한 탓이다. 마치 칼로 심장을 저미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기분이 들어, 해야 할 일을 미루고만 있었다. 에메트셀크는 뻣뻣하게 굳어져 열이 오른 제 눈가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머리가 아팠다. 불완전한 것들은 대체 마음을 정리한다며 왜 이런 걸 죽어라 퍼마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리해야지. 이제는 미룰 수 없다. 에메트셀크는 오만상을 썼다가 바람 빠지는 듯한 숨소리를 픽 흘렸다.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것이었다.
 
“괜히 마셨어.”
“이제 와서 무슨….”
“난 좀 자야겠는데, 영웅님.”
“뭐? 잠깐, 잘 거면 침대에 가라고… 이봐, 에메트셀크…!”
 
기대고 있던 몸이 잠시간 들썩인다. 그대로 이딘이 떠나 텅 빈 소파에 퍼질러 누워버려도 상관은 없겠으나, 어쩐지 그러고 싶어진 탓에 에메트셀크는 이딘의 소매를 붙잡았다. 술김에 벌인 일이다. 적당히 밀쳐내고 일어나던지, 아니면 침대로 끌고 가던지, 어느 쪽이든 이 영웅 나리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임에도 그는 한 번 몸을 들썩였을 뿐, 다시금 제자리를 지켰다.
 
그래, 이 남자는 결국 이렇다. 말도 안 되는 걸로 투정을 부리고 싸워도, 기어코 세계를 넘어서까지 찾으러 오지 않았던가. 어쩌면 그래서 신경이 쓰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늘 멋대로 다가오고, 투덜거리면서도 옆에서 자리를 지켰으니까. 에메트셀크는 눈을 감고, 천천히 수마에 제 몸을 맡기며 생각을 이어갔다.
 
곁을 떠난 사람.
 
그리고 곁에 실재하는 사람.
 
‘아마 다시 별바다로 돌아갈 때까지 나는… 아젬을 잊지 못하겠지.’
 
상실이란 그런 것이다.
 
에메트셀크의 책무는 실패로 얼룩졌으며, 그가 사랑하는 세계는 물보라에 휩쓸리듯 사라져갔다. 그 잔해는 영혼에 흉한 자욱들을 남겼으므로, 도무지 외면할 수가 없다.
 
그러나 삶의 맺음을 유예하기로 했다면 상실에 영영히 잠겨있을 수만은 없다. 이제는 진정으로 떠나간 이를 마음에서도 보내주어야 한다. 그걸 위해 할 일이라면, 글쎄… 가령 이 녀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거나. 빛의 전사와 아씨엔 에메트셀크, 현 인류와 고대인, 영웅과 세계의 적… 그 칭호들을 하나씩 벗겨내고 나서야 우리는 날것 그대로의 이름을 가지고 서로를 마주 볼 기회를 얻은 셈이니.
 
더 이상 자신은 세계의 적이 아니며, 영웅의 숙적도 아니다. 그러니 에메트셀크는 그에게, 그리고 그가 지켜낸 세계에 마땅히 경의를 표해야 했다. 세계에 남은, 이제는 가장 오래된 옛 사람으로서.
 
스쿤에이딘.
 
…하데스는 나직하게 그 이름을 혓바닥 위로 굴려보다가 흐려지는 의식을 완전히 놓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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