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또님이 써주신 가내 빛전에메 백업 S2
이따금 그런 날이 있다. 따분하지는 않지만, 평온한 나날 속에서 무심코 말을 내뱉게 되는 그런 날이. 그의 삶에는 언제나 새로운 모험이 필요했다. 한계에 다다라 그 이상을 넘는 순간도, 영웅도 아닌 한 사람의 모험가로서 생사를 가르는 대결도 빠질 수 없었다.
하지만 타타루의 말처럼, 휴식이 필요할 때가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였다. 그것만 빼면 별다를 게 없었다. 이 사람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나, 하고 의문이 드는 것만 제외하자면.
그날은 비가 내렸다. 양 손을 품에 깊이 찔러 넣은 에메트셀크가 창가에 서 있었다. 그 옆으로 그의 영웅나리가 다가왔지만, 둘 사이에는 별 말이 없었다. 언제부턴가 그랬다. 둘에게서 침묵은 더 이상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기대할 것도, 바랄 것도 없었다. 단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지루하지도 않았다. 이 녀석과 있으면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지금은 그저, 비가 내리는 걸 같이 보고 있을 뿐이었다.
“에메트셀크.”
“……내가 네 녀석의 이름을 쉽게 부를 거라 생각하지 마라.”
“전보다는 횟수가 늘긴 늘었잖아.”
“이딘?”
“그래, 이딘. 불러 봐, 내 이름. 타인에게 이름을 불리었으면 너도 불러봐야할 거 아니야.”
“이봐, 영웅나- 갑자기 무슨… 할말이 있으면 제대로 해. 아아- 아니면 따분하기라도 한 참인가? 그렇다면 네 녀석이 제대로 집중하지 않아서일 거다. 요새 ‘모험’도 하지 않고 이곳에 틀어박히기만 하잖아. 휴식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긴 감이 있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너는 말이 길어. 어느 대륙에서는 혀가 너무 길다고 표현하지.”
이딘이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에메트셀크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래서 용건은?”
“이유는 없어. 그저 부르고 싶었을 뿐이야. 내가 하지 못할 건 없으니까.”
“너는 욕심이 많아.”
“내가 원하는 건 다 할 참이야. 지금은 그 때를 위해 잠시 휴식을 취하는 중이니 너무 걱정 말라고. 상냥한 고대인 씨.”
“장단에 맞춰줄 생각 없으니 다른 사람을 찾아보지 그래.”
이런 얄미운 태도에 에메트셀크는 술술 말을 풀어내고 싶지 않았다. 모처럼 비오는 날의 어떠한 감상이 깨져버린 듯한 느낌에 기분이 살짝 언짢기까지 하였다. 그때 이딘이 이어 말했다.
“예를 들면 사랑한다고 하는 말도.”
이딘은 그 말만 남기고 소파로 가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둘의 눈은 마주치지 않았다. 만약 마주쳤다면, 오랜 세월을 살아온 에메트셀크라 해도 순간적으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을 것이다. 하데스였을 때처럼 진지하게 받아들였을까, 아니면 그 에메트셀크답게 익살스런 말투로 넘겼을까. 이제 에메트셀크는 더 이상 창밖을 바라보지 않았다. 이딘은 그가 자신에게 시선을 두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끝내 에메트셀크를 마주하지 않았다.
에메트셀크는 이딘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여전히 양팔을 품 속에 찔러 넣은 채로 이딘을 바라봤다. 시선은 일정하지 않았다. 때로는 눈매가 변했지만, 그 안엔 즐거움이나 흥미로움과는 거리가 먼 감정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특유의 찌푸린 표정은, 그가 하데스였을 때 자주 짓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심한 듯하면서도 혼까지 꿰뚫어보는 금빛 눈동자에도 이딘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
“할말 있으면 말해, 하데스.”
“이럴 때는 마음대로시군. 아주 편리하게도 말이지.”
에메트셀크는 그리운 누군가가 떠올랐지만,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그의 옛날은 녹아드는 별바다였으며, 그의 지금은 이곳이었다.
“네 녀석이 무슨 생각인 건지 묻고 싶은데. 말할 수만 있다면 말이지.”
“사랑한다고 말한 이유가 그렇게나 궁금한가 봐?”
그 말에 에메트셀크는 그를 노려볼 뿐, 입을 다물었다. 이딘은 여전히 책에 눈을 고정하고 있었는데, 에메트셀크는 그런 태도를 더 이상 참으려 하지 않았다. 이제는 종말로부터 세계를 구하는 모험도, 빛의 전사와 아씨엔으로 서로를 주시하던 시절도 아니었다. 이 고요한 휴식을 무의미하게 끝내는 것 역시 에메트셀크의 성정에 어울리지 않았다.
딱,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딘이 들고 있던 책이 사라졌다. 책은 어느새 책장으로 옮겨져 있었다. 그제야 이딘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야를 가로막은 것은 에메트셀크의 그림자였다. 이딘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흥미로운 눈빛을 보였다. 하지만 에메트셀크는 이제 그런 도발에 넘어갈 리 없었다. 그가 이딘의 무릎에 앉자, 이딘의 손이 자연스럽게 어디를 붙들고 있는지 에메트셀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딘은 가볍게 혀를 찼다. 둘의 시선은 이번엔 서로를 향하고 있었다. 에메트셀크의 양손은 부드럽게 이딘의 목을 감싸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말을 할 때는 상대를 정확히 보고 하는 거다. 이참에 배워둬.”
“지금 날 가르치는 건가?”
“알려주는 거지. 우리 영웅 나리께서는 이런 것에 익숙치 못한 듯 하여, 인생을 좀 더 아는 사람이 아무래도 깨우친 바를 선사해주는 것도 나쁘진 않으니 말이야.”
“역시 너는 말을 장황하게 하는 편이네.”
“잔말하지 말고 슬슬 받아들기나 해. 이런 식으로 피하려고 하지도 마.”
에메트셀크는 이딘의 속내를 꿰뚫은 듯, 심술궂으면서도 오만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딘이 반박할 틈을 찾는 사이, 에메트셀크는 오히려 그의 코끝에 자신의 코를 살짝 문질렀다. 이딘이 무언가 말하려 하면, 그는 고개를 살짝 뒤로 젖혀 피했다. 이딘이 그를 더 가까이 끌어당기려 하자, 에메트셀크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실쭉이는 미소까지 지었다.
“제대로 말해. 그러면 나도 호응해주도록 하지.”
이딘은 이렇게 말하는 에메트셀크가 이상하게 싫지는 않았다. 직설적으로 인정하자면 그 반대가 맞을 지도 모른다. 아마도 말이다.
“사랑한다고 말했지.”
“누구를?”
“하데스, 너를.”
둘의 시선은 이리저리 움직였지만, 그 안에 관찰이라는 의도는 없었다. 입술은 언제든 맞닿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작은 움직임 하나도 이미 서로에게 포착된 상태였다. 오래 머무는 눈길은 쉽게 떨어질 기미가 없었다. 에메트셀크는 새 육체를 얻은 이후로 자신이 이런 긴장감을 느꼈던 적이 있었나 생각해보았다.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굳이 그걸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딘이 기고만장한 꼴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이딘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었다. 하나로 이어진 두 사람의 숨결 사이에는 아무것도 끼어들 수 없었다.
“사랑해.”
이딘의 두툼한 손이 에메트셀크의 턱선을 타고 입술까지 스치자, 에메트셀크는 아무런 저항 없이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는 이딘의 시선을 자신의 눈으로 끌어오려 했지만, 이딘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결국 에메트셀크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말았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동작이었기에, 이딘은 에메트셀크가 왜 그러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앞으로도 그는 에메트셀크의 이런 미세한 반응들을 알지 못할 것이다. 다만, 지금 이딘이 분명히 느끼고 있는 건, 에메트셀크가 그의 입맞춤을, 그리고 그 다음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사랑이라는 노골적인 단어가 그들 사이에 정말로 필요한지, 그들의 관계를 그런 말로 묶을 수 있을지는 오직 그들만이 알 수 있는 문제였다. 확실한 건, 세계를 무너뜨리고 구하려는 자들에게도 사랑이라는 감정은 분명히 존재했다는 것이다. 굳이 결심하지 않아도 어느새 물결에 휩쓸리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마치 모래사장의 모래알이, 아무리 밀려나도 결국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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