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16
- 빛전에메
- https://aetherial-journey.tistory.com/3 에서 이어지는 빛의 전사 스토리
별빛축제.
에오르제아의 계절 축제 중 하나다. 니메이아의 성인(聖人)을 기념하는 날이라나 뭐라나. 붉은색과 흰색으로 꾸며진 별빛 의상을 입고 타인에게 행복을 선물하는 유서 깊은 축제로 알려져있다.
이딘은 별빛축제를 꽤 마음에 들어 하면서도 귀찮아했다. 축제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아하는 편에 속했으나 여기저기에서 자신을 알아보고 붙잡히는 통에 조용히 축제를 즐길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불만이었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그들과 그 사이에 일종의 계약을(?) 맺게 되었는데, 그건 바로 축제가 열린 당일 하루만 얼굴을 비추는 것이었다. 물론 행사위원이나 어린아이들에게 발견되면 놀아준다거나 일손을 도와주는 일 등으로 단단히 붙잡혀 늦은 저녁에서야 겨우 풀려나긴 했지만 그 다음 날엔 딱히 몸을 숨기면서 구경을 다닐 필요 없이 편하게 축제를 즐길 수 있었다. 놀아달라거나 도와줄 수 있냐는 제의를 완전히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가볍게 팔짱을 끼는 정도의 제스쳐만 취해주면 즐거운 시간을 보내라는 말을 남기고 알아서 자리를 비켜주고는 했다.
축제가 열리고 난 다음 날 이른 아침, 이딘은 일찍 집을 나섰다. 산책도 할 겸, 축제로 인해 화려하게 단장된 거주구와 시가지를 구경하며 가볍게 마을 한 바퀴를 돌았다. 이곳저곳 열심히도 꾸민 알록달록한 장식들과 밤새 내린 하얀 눈, 그리고 그것을 비추는 아침햇살의 반짝임이 더해져 저녁에 보는 모습과는 다른 느낌의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냈다.
길게 숨을 들이키니 상쾌하고 시린 아침 공기가 들어와 잠들어있는 몸을 깨웠다. 얼어붙은 대기가 뺨과 코를 때려 그 끝이 붉어졌다. 이딘은 허옇게 뿜어져 나오는 입김과 마찰열로 손을 녹여보고자 큼직한 제 양손을 비비며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구경은 적당히 했으니 이제 돌아가서 간만에 얻은 길고 달콤한 휴식을 즐길 일만 남았다. 벽난로 앞에 앉아 어깨엔 제 몸집을 간신히 덮을 담요를 두르고 나가기 전 끓여둔 차를 마시며 자신만의 안락한 집에서, 아무런 방해 없는 조용하고 편안한 시간을 음미하며 실컷 뒹굴 거릴 예정이었다. 분명 그럴 예정이었다.
“못 볼 것이라도 본 얼굴이로군. 축제는 잘 즐기고 있으신가?”
별의 바다로 돌아갔을 존재가 현관 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1세계에서 처음으로, 그리고 아마도 수만 년 전의 고대 세계에서도 들었던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다시금 내리 꽂혔다.
종말의 직전, 하늘의 끝에서 본 모습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만날 수 없을 거라 생각한 존재가 눈앞에서 나타날 확률은 얼마가 될까. 가만히 계산해보며 제 앞의 객을 위부터 아래로 훑다, 문득 그가 입고 있는 의상이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이딘의 손이 남자의 팔을 세게 붙들곤 제 쪽으로 잡아당겨, 집 안쪽으로 냅다 밀쳐넣었다. 뒤이어 무언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부리나케 주변을 살피다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았다. 이딘의 과격한 행동에도 남자는 불쾌해하거나 짜증을 내기는 커녕, 오히려 즐거운 듯한 표정을 짓고는 제 앞에서 씩씩대는 영웅을 올려다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마치 엄청난 불청객을 맞는 듯한 태도로군 그래.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인가?”
“그걸 말이라고. 게다가 네녀석, 지금 제정신으로 그 옷차림으로 온 거냐?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갈레말 제국 초대 황제의 상징적인 의상이지. 모르고 이렇게 왔을 리가 없잖아. 안 그래? 영웅 나으리.”
에메트셀크는 연기를 하는 듯한 말투로 답하며 가벼운 인사를 하는 시늉을 했다. 영웅은 어처구니가 없는 듯 미간을 구긴 채로 쏘아붙였다.
“알고서 그 꼴로 찾아왔다고? 얼마나 꼬이신 걸까, 완전한 인간이나 되시는 분이.”
“할 말은 그것 뿐인가? 나 참, 영웅님을 배려해서 알아보기 좋은 몸을 구해 찾아왔더니 이런 냉대나 당하고-“
“그딴 배려는 해달라고 한 적이 없는데.”
그의 반응을 예상했던 듯, 에메트셀크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곤 팔을 들어 과장되게 으쓱여보였다.
“어떤 모습이든 지금 같은 태도로 나올 것 같아서 말이야. 내친김에 영웅님한테 장난 좀 쳐보고 싶었거든.”
어때? 마음에 드나? 미간을 짚은 채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그의 근처에 서있던 에메트셀크는 발걸음을 옮겨 집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제법 흥미로운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영웅이 애용하는-큼직하고 푹신한 소파로 다가가선 마치 자신의 침대에 몸을 던지는 것처럼 풀썩 앉아 몸을 늘어뜨렸다. 소파가 그에게 꽤나 편안했는지 얼룩 하나 없는 흰색 장갑 낀 손을 배 위에 포개어 얹고, 만족스러운 고양이처럼 반쯤 감긴 눈으로 저를 노려보는 영웅을 향해 특유의 얄미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딘은 그와 그가 앉은 소파를 통째로 들어 바깥으로 내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이딘에겐 수많은 경험을 통해 얻은 어느 정도의 인내심을 갖고 있었다. 충동적으로 행동해 어렵사리 얻은 그것을 내다버린다면 치밀한 계획을 세워 겨우 얻은 휴식이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길고 깊은 심호흡으로 제 짜증과 화를 삭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별바다로 꺼-… … …돌아간 줄 알았는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다시 왔지?”
흠. 짧게 침음하는 소리가 들리며 침묵이 흐른다 싶더니 곧이어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그냥. 조금 신경 쓰이는 것이 있어서.”
“네녀석이 그렇게 자랑하던 제국은 어쩌고?”
“거긴 이제 폐허가 됐잖아? 파다니엘이 벌인 일로 그곳은 더 이상 내 취향도 아니게 됐고. 게다가, 어느 영웅님 덕분에 머물 곳이 완전히 없어져 버렸거든. 그러니- 제국을 초토화시킨 영웅님께 신세 좀 지려고. 정 많은 우리 영웅님께선 머물 곳도 없는 불쌍한 사연을 가진 이 아씨엔을 눈보라 치는 추운 바깥으로 내치지 않으시겠지요?”
어이가 없는 듯 가늘어진 영웅의 눈동자가 본인을 향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는지, 에메트셀크는 과장된 목소리와 몸짓으로 말을 이어갔다.
“ 역-시 아량도 넓으셔라. 감사의 의미로, 곤란한 상황을 만들지 않고 조용히 머물도록 하지. 내킨다면, 영웅님의 일에 도움이 되어드릴 수도 있고.”
재미있는 것을 찾아낸 고양이처럼 얄밉게 웃어 보이며 팔로 여러 제스쳐를 만들어 보이는 그를 향해 이딘은 한숨을 푹 내쉬며 손을 들어 됐다는 듯 흔들어 보였다.
“그 옷이나 치우고서 말해라, 더 이상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으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얄미운 얼굴, 정확히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덮히고도 남을 큼지막한 이불같은 것이 에메트셀크에게 던져졌다. 푹 파묻힌 그는 덮여진 이불을 머리에서 걷어냈다. 자세히 보니 이불이 아닌 잠옷 가운이었다. 과연, 루가딘에게 맞춘 옷이라 그런지 이불로 착각할 만한 크기였다. 이게 뭐냐는 시선을 쳐내듯 이딘은 에메트셀크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영 미덥지가 않아서. 여분의 옷이니 그거라도 입고 계시던가. 잘난 마도사시니 마법을 써서 맞추든 그냥 입든 마음대로 하시지요.”
투덜거리는 목소리 뒤로, 만족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딘은 마른 세수를 하며 연신 한숨을 쉬어댔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했던가, 실제로 그랬다. 그렇게 원하던 혼자만의 조용한 휴식을 잃고 그 자리에 세기의 악당께서 들어닥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갑작스럽게 찾아온 그를 내칠 수도 있었지만 이딘은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일이 복잡해지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으나,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정말로, 이딘에게 곤란하기 짝이 없는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