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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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이데아]
어린 시절, 페르세우스가 하데스와 작별하기 전 함께 만든 이데아로 작고 길쭉한 사각형 크리스탈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각각의 면에는 그들의 에테르 색이 섞여서 빛나고 있다.
크리스탈엔 그들의 기억이 일부 담겨있으며 다시 재회하게 될 날을 고대하는 마음을 담아 이것으로 어릴 적의 기억을 추억하며 우정을 이어 나가고자 하는 목적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하데스는 어릴 적, 그의 친우 페르세우스와 헤어진 이래로 줄곧 이 이데아를 가지고 있었다.
엉성하지만 제법 형태는 갖춰진 크리스탈에 하데스가 보강을 하며 완성된 이데아는 비록 어린 나이에 만들어진 작품이라 완벽하진 못했으나 충분히 두 사람의 추억을 담을 만한 그릇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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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데스는 돌아온 페르세우스가 반가우면서도 어딘가 불편한 감정을 지울 수 없었다.
페르세우스는 분명 그가 누구였는지 잠깐 기억을 더듬고 있었던 자신과는 다르게 본인을 확실히 알아보았다.
그리구 이후, 14인 위원회의 일원이 된 이후에도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적잖은 만남을 가졌고, 그 만남 속에서 수많은 대화를 나눴다. 일과 관련된 이야기나 시시콜콜한 말장난, 일상에서 나눌만한 것들 등등 대화의 주제는 언제나 달랐고 매우 다양했다. 하지만, 정작 함께 만들었던 이데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그는 그 주제를 피하는 듯 말을 돌렸다. 그 기억을 떠올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영영 묻어두고 싶은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 생각하고 꺼내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인지 하데스로서는 그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그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종종 그 이데아를 꺼내 볼 때마다 자신이 느꼈던 심정과 크게 다를 것 없겠지.
누구든 그렇겠지만, 어릴 적의 서투른 손길이 가득 담겨 있는 물건을 보고 있으면 아무도 없는 공간이라 할지라도 괜히 누군가의 눈에 띌까 봐 걱정하기 마련이다. 가슴께가 간질거리면서 금방이라도 덮어두고 싶은 욕구를 누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하데스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 크리스탈에 담긴 기억을 들여다보면 직전의 걱정은 아주 잠깐이었다. 부끄러움을 잊을 정도로 즐거웠던 당시의 기억, 감정, 이야기, 사소한 약속들을 살펴보고 있자면 아무리 고되고 힘든 하루였다 하더라도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추억 속에 파묻혀 금세 잊어버리곤 했기 때문이었다. 메모리아를 꺼내보는 빈도가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추억이 담긴 그 이데아는 하데스에게 많은 도움이 되어왔었다. 때로는 의지할 수 있는 모습으로, 마음의 위로가 되는 형태로.
하지만, 그렇게 소중히 여겨왔던 것은 나뿐이었나.
페르세우스가 이데아에 대한 이야기를 피할 때마다 왠지 모르게 마음 한 켠이 아려왔다.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가 먼저 크리스탈은 잘 갖고 있었느냐 혹은 소홀하게 다루고 잊어버린 건 아닌지, 그랬다면 토라졌을 거라는 둥, 그가 먼저 말을 붙이며 이야기를 꺼내올 줄 알았다.
먼저 추억을 기념하자고 말을 꺼낸 것도 페르세우스였고, 약속을 한 것도 그였다. 먼저 시작해 놓고 자기는 잊어버리다니? 그게 아니라면, 자신과의 추억을 부끄러워하고 있기라도 한단 말인가?
꼭 쓸데없는 쪽에 고집을 부리고 이상하게 말을 아끼는 놈인지라 답답해 스멀스멀 짜증이 올라왔지만 그렇다고 먼저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만에 하나, 메모리아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을 때 페르세우스로부터 돌아올 최악의 대답을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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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우스는 늘 가지고 다니던 메모리아를 꺼내 제 큼직한 손 안에 조심히 그러쥐었다. 그리고 가만히 눈을 감으며 부모님의 손을 잡고 아모로트를 떠나던 그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에테르의 흐름에 의해 형태가 뭉그러지며 아끼는 친우의 모습이 제 시야에서 사라지기 직전, 페르세우스는 하데스가 자신을 배웅하고 돌아서는 모습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등을 돌린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둘만의 아지트에서 가면을 내려놓고 얼굴을 마주한 채 인사했을 때 보았던, 이별을 매우 아쉬워하던 그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명했다.
아모로트를 떠나기 며칠 전, 페르세우스는 하데스에게 함께 이데아를 만들어 보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페르세우스의 성향은 하데스와 확연히 달랐으나, 그와 어울리며 자신과 생각도 꽤 잘 맞고 서로 통하는 구석이 있다 느끼게 되었는지 조금씩 붙어 다니기 시작했다. 이 제안을 하게 된 것은 둘이 함께 다닌 시간이 꽤 지난 뒤, 떨어져 있는 때가 손에 꼽을 정도로 사이가 깊어졌을 즈음이었다.
이제 막 수업을 마친 뒤 복습의 취지로 배운 것을 써먹어 보자며 페르세우스는 자신의 로브의 팔 소매를 걷어붙이며 웃었다. 반대로 하데스는 영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다. 페르세우스가 이럴 때마다 꼭 사고가 몇 번은 터졌고 그 정리는 자기 몫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페르세우스도 돕기는 했으나.)
하지만 무슨 일인지 답지않게 고집을 부리며 떼까지 쓰려는 페르세우스를 밀어내지 못했고 결국 그의 부탁을 들어 주게 되었다. 페르세우스가 얼기설기 에테르를 엮어 형태를 빚으면 하데스는 마치 실로 옷을 꼬매듯 그 틈새를 이어붙인다. 그리고 빚어준 형태를 계속 유지할 수 있게끔 보존 마법을 걸어둔다. 무언가를 담을 그릇이 완성되었다.
서투른 솜씨 탓에 완전하진 않았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제법 만족스러운 얼굴로 뿌듯해하던 페르세우스는 그제서야 고집을 부리며 자신이 이것을 만들고자 했던 이유를 하데스에게 털어두었다.
사정이 생겨 며칠 뒤 아모로트를 떠나게 됐다는 이야기. 하데스는 잠깐 당황하는 기색이었으나, 이내 받아들였다는 듯 솔직하게 말했다면 고집을 피우지 않아도 도와줬을 거라며 툴툴거렸다. 그 투덜거림 속에 묻어나는 아쉬움을 알아챈 페르세우스는 이 그릇에 자신들의 기억을 담자고 제안했다. 타임캡슐처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꺼내어 추억을 되짚어 볼 수 있도록, 그리고 자신이 도시로 돌아왔을 때 서로를 알아보고 이데아에 담아놓은 추억으로 이야기꽃을 피워 다시 이 우정을 이어 나갈 수 있도록. 조금 망설이던 하데스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데스와 헤어지기 전 나누어 가진 크리스탈. 언제, 어디를 돌아다니든 페르세우스의 짐꾸러미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 있었다. 가끔씩 지치거나 외로울 때, 어딘가에 의지하고 싶을 때마다 메모리아를 꺼내 들곤 했다. 메모리아의 면면에 새겨진 수많은 기억의 빛들은 언제 봐도 따뜻하고 편안해 추억에 잠기기 딱 좋았다.
그렇게 옛 기억을 잔뜩 만끽하고 난 뒤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역시, 그때 그에게 고집을 부려 만들어 두길 잘했다며 웃고는 했다. 페르세우스에게 있어서 그 이데아는 자신이 사랑하는 세계만큼이나 소중한 것이었다.
아모로트로 돌아가 하데스를 마주한 페르세우스는 그가 반가웠으나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당황했었다. 물론 본인이 그렇게 비약적으로 자랐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체감이 되지 않았지만 자신을 알고 있던 옛 지인들의 반응을 보면 꽤 바뀌었나보다 싶긴 했었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그라면 금방 알아챘을 줄 알았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던 그 찰나가 꽤 충격이었는지 함께 만든 이데아에 대한 이야기를 쉬이 꺼내지 못했고 피하게 되었다. 하데스와 나누는 대화의 주제가 그 크리스탈로 흘러갈 것 같으면 부러 화제를 돌렸다.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들어버릴 것만 같은 불길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이데아에 대한 서로의 오해는 깊어져 갔으나 둘의 관계는 변함이 없었다. 고작 이데아 하나로 꽁해져 얼굴을 마주하지 않기엔 그들이 앉은 자리가 있었고 맡은 일들에 정신이 없었으며, 이데아 하나로 시작하고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었다는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둘 사이가 점차 가까워지며 새로이 싹튼, 알 수 없는 감정에 이끌린 것이 가장 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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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에메트셀크는 업무와 관련된 대화를 하던 중 한 고대인에게 들은 질문에 말문이 막히게 된다.
“아젬님과 에메트셀크님은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꽤 가깝게 지내시는 것 같습니다만, 혹시 연인 관계라도 맺으셨으려나요?"
별생각 없이 꺼낸 단순한 주제답게 질문을 던진 이의 말투는 가벼웠으며 장난스러웠다. 하지만 일순 굳어진 에메트셀크의 표정을 눈치챘는지 실례되는 질문이었다며 금세 사과의 말을 꺼냈다.
"아,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부디 흘러 넘겨주시길."
"괜찮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아젬과 지내온 시간이 짧은 편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다소 괴짜 같은 구석이 있으나 손발이 잘 맞는 친우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평소처럼 아니라 답하며 가볍게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째선지 에메트셀크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 채 그를 돌려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 계속, 에메트셀크는 어째선지 그 고대인에게 들은 질문을 머릿속에서 지워내지 못했다. 잊혀지지 않는 그 말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가며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왜 가볍게 받아치지 못했는지, 아젬을 마주할 때마다 품게 되는 은근한 짜증과 알 수 없는 감정의 출처는 어디인지, 메모리아에 대한 것 정도야 성숙한 시민답게 덮어두면 되는 것일 텐데도 잊을 만하면 떠오르는 이유가 무엇인지.
에메트셀크의 미간에 주름이 하나 더 새겨졌다.